[2024] #3 적과의 동침: 흑백논리

#2가 아닌 #3 인 이유는, #2 글은 이미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느순간 비공개로 바뀌었을 뿐.

 

적과의 동침: 흑백논리

1) 등잔 밑이 어둡다. 내가 항상 경계하는 것이 실제론 내 안에 있을 수 있다.

2) 흑백논리. 내가 가장 경계하는 여우이다. 내 맘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다.

 

난 메타인지가 뛰어나다. 

나무위키를 빌리자면,

메타인지: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이나 지식에 대해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이게 맞나 아니나 스스로 검증을 거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내가 맞는 건가 하면서 스스로 의심할 수도 있다.

 

나의 사고 능력은 고2때 부터 시작 되었다. 다른 글에서도 많이 언급 했지만, 그 당시 나는 세상이 나에게 제시하는 길이 맞는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맞는지 다시 따져보는 과정"을 거쳤다고 할 수 있다. 즉, 믿지 않아서 의심하는게 아니라 맞으면 맞고, 틀리면 틀리다 라는걸 체크해 보자는거다.

 

그 이후, 나는 어떠한 소식을 접할때도 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법을 자연스레 익혔다. 특히 요즘 시대에 더욱 필요한 능력이라 생각한다. 숏폼이 대세인 21세기는 무의식적인 받아들임에 노출되기 너무 열악하니까. 이미 절여졌지만.

 

하지만 나 조차도, 때때로 나의 함정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 그건 바로 "나"에 대해 생각할 때다.

 

훈수, 인지적 부하, 터널 비전

바둑을 둘 때, 게임을 직접 플레이하는 사람은 많은 정보를 처리하고 여러 가지 가능성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인지적 부하가 높다. 반면, 제 3자인 관전자는 이러한 요인에서 자유롭기 때문에 더 객관적으로 상황을 판단하고 더 나은 전략을 제시할 수 있다. 이것을 "훈수"라고 한다. 

 

마찬가지다.

 

내가 세상을 바라볼 때는 객관적으로 비판적으로 판단하는건 노력하면 가능하다. 하지만 우리가 자기 자신에 대해 객관적으로,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충분한 노력으로는 어렵다.

 

나는 어느정도 나 자신을 의심하는 생각에 익숙하지만, 어떠한 내가 아직 잘 모르는 영역에 대해 "선택"이나 "판단"을 하려 할 때 여전히 흑백논리에 갇히는 경향이 있다.

 

비전의 부재

최근 박사학위에 진학하는 것에 많은 고민이 있다. 그 이유는 내재적 요인에 기인한다.

 

나는 "그냥"하는 걸 잘 못한다. 항상 뭔가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이유는 최대한 나를 위한 것이어야 하고, 나의 미래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박사학위를 받으려 한다는 것은, 연구자가 되기 위함인데, 연구자란 무엇일까? 연구를 하는 사람이다. "연구"란 무엇일까? 나아가 좋은 연구란 무엇일까?

 

이런걸 고민하다보면 답이 쉽사리 나오지 않는다. 일단 난 아직 초짜 연구자이기 때문이다. 이제 1년, 제대로 연구해본 적도 없으면서 이런것에 대한 답을 얻으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내가 뭘 이루고자 대학원에 진학했는지 희미해지기 시작한다. 가만 생각해보면 난 "연구"라는 키워드 보다는 나의 궁금증을 해결하고 더 깊이 있게 공부하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했다.

 

아마도 많은 학생들이 나와 같은 이유에서 시작했을거다. "호기심". 하지만 대학원에 진학하고, 자의든 타의든 "연구자"의 길에 올라탄 이상 "연구"를 해야만 한다. 그러면 여기서 고민이 생긴다. 어떤 연구를 어떻게 할 것인가.

 

연구도 마찬가지로 호기심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공부와 달리 연구는 결과물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연구자는 결과물로 평가받는다.

 

나는 학점과 같은, 이미 내가 쓸모없다고 생각한 지표에 대한 평가는 신경쓰지 않는다. 다만, 논문과 연구라는 것은 연구자로서의 나의 자질을 평가받는 것이기 때문에, 신경쓰지 않으려 해도 어쩔 수 없이 신경이 쓰인다. 때문에, 더 "중요한" 연구를 하고 싶다는 욕망이 자연스럽게 생겨난다.

 

"중요한" 연구라는 것은 무엇일까. 여기엔 많은 대답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어떤 관점에서는, 어떤 연구가 중요한지 안한지는 "현재"엔 판단할 수 없다. 뭐든 후대에 평가받아 중요한지 아닌지 재판단되는 거니까.

 

그렇기 때문에 "비전"이 중요한거다. 현재 내가 하고있는 일이 미래에 중요해 질 것이라는 믿음. 그게 비전이다.

 

우리가 어떤 CEO를 평가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 CEO가 기업의 비즈니스를 통해 이루려 하는 궁극적 비전에 사람들은 매료된다. 하지만 연구에 있어 비전은 어떤 역할을 할까?

 

내 생각에 "비전"과 "연구"는 그닥 어울리는 단어 쌍이 아니다. 내가 한국 대학원에 다녀서, 그러니까 한국의 학계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대게 연구를 "장기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지 않기 때문이다.

 

비전이란건 단순히 오늘 내일의 문제가 아니다. 적어도 20년의 미래다.

 

하지만 오늘날의 연구는 (내 분야 한정, 다른 분야는 모름) 지금 생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지를 고민한다. 이것도 틀리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 컴퓨터는 미래에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아키텍처는 현재 중요한 워크로드들을 대상으로 연구를 하는데, 미래에 어떤 어플케이션이 나타날지, 중요할지 모르기 때문에 미래를 고려할 수 없는것이 한계이기도 하다.

 

다시, 적과의 동침

난 "비전"파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미래를 이루게 하기 위한 현실을 살고 싶다. 이런 목적을 가지고 대학원에 입학했지만, 내가 경험하고있는 대학원은 나의 기대가 어울리지는 않는 곳이다. 그렇다고 싫은 건 아니다. 연구는 연구대로 흥미있고 재미있는 것이니까.

 

그렇다면 생각해봐야 하는 것은, 나의 기대를 어떻게 다시 채울 것인가 하는 부분이다.

 

오늘 글이 상당히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 여기서 다함께 뭉쳐진다. 결국 나의 고민은, "중요한" 연구라는게 무엇일까? "비전"과 "연구"를 어떻게 한 틀에 넣을 수 있을까? 같은 것들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한 과정이었는데, 이는 애초에 질문이 잘못되었던 것이다.

 

이질적인 두 개를 한 틀에 넣으려고하니, 애초에 다른 두 가지를 이것 아니면 저것 식의 흑백논리로 판단하려고 하니 답이 나오질 않았던 것이다.

 

연구는 연구대로, 비전은 비전대로

최근 재미있게 보는 드라마가 있다. "굿파트너"

 

여기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인간 한유리와 변호사 한유리를 구분해

 

이 대사를 듣고서 나의 문제 해결에 대한 실마리를 얻었다. 난 여태 "연구"와 "비전"을 하나의 틀에 넣고 있었던 것이다. 즉, "둘 다" 라는 하나의 선택지만 놔둔채 고민하는 흑백논리에 휩싸여 있던 것이다.

 

박사과정에 진학할지는 여전히 고민중이지만, 학위 과정동안의 연구는 연구대로 해야하는거고, 내가 개인적으로 이루고 싶은 비전이 있다면, 그 비전을 위해 노력하는건 별개로 하면 문제는 해결된다.

 

물론 연구가 나의 큰 비전 안에 있으면 좋기야 하겠지만, 가능할지는 더 고민해봐야 한다.